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변질된 유교적 전통 (문단 편집) == 개요 == 본래 [[공자]]의 가르침으로 일컬어지는 [[유학]]에서 변질된 양상으로, 현대 한국에서 유학 및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유발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에 해당한다. 조선이 [[성리학]]을 사회질서관념체계의 기본으로 삼은 뒤 [[사림파]]가 그 이론을 심화시켜 정리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침략전쟁들을 당하며 국가가 전쟁터가 되어 초토화가 되었다가 재건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성리학이 [[교조주의]], [[원리주의]]로 가게 되며 사회가 경직되고 엄격해졌다. 그 시대의 바람직하게 여겨지고 깊은 지식이 없어도 이해가 쉬운 윤리관을 살펴보고 싶다면 어린이용 교재인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523|동몽선습]],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5029|사자소학]]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어른의 아이 사랑 그 자체, 친구 사이의 우애와 같은 부분은 현대 사회에서도 받아들이는데 무리가 없는 부분인데, 남성에게 부담을 지우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강조하는 성역할과 관련된 부분이나 자식은 몸도 자기 것이 아니며 멀리 나가 놀아도 안되며 부모가 아무리 잘못해도 세 번 거절하면 울면서 따라야한다는,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길 수 있는 부분은 현대 한국 등지의 사회에서 이와 관련된 갈등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유학의 내용과 유교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이 변질된 유교전통을 들어 유학과 유교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가장 원류이자 시초의 양상으로 꼽히는 유학의 모습은 단연 공자 및 맹자의 학설들로, 지배층의 논리에 완전 편입되기 전의 모습이다. 다만 [[한나라]] 시절 유교가 국교로 받들어지며 권력의 입맛에 맞게 변질되어 나중에 가면 권력자의 억압을 정당화시켜주는 수단으로 악용된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한무제]] 시절 동중서가 천인감응사상[* 서양의 [[왕권신수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을 주창하여 유교적인 논리를 지배층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만드는데 사용한다. 위나라의 [[왕숙]]은 공자가 했다는 언행이 왜곡된 공자가어를 편찬하고, 그 내용 가운데에는 [[삼종지도]]와 같은 조선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심지어 현대 대한민국에 간접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킨 사상도 있다. [[구한말]]에도 [[박은식]], [[신채호]] 같은 인사도 당대 유교에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역설하기도 했다. '''다만 이는 [[유교]]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정치 권력과 결합한 사상이나 종교가 다들 가지고있는 공통의 문제이다.'''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예수 추종자들의 사상인 기독교를 부정하고 탄압하다가 훗날 오히려 자신들의 지배 이념으로 삼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중세에는 왕과 귀족들이 [[왕권신수설]]을 통해 기독교와 유착하여 한층 더 권력기반을 정당화화고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다보니 프랑스에서 세속주의 정책인 [[라이시테]]를 실시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왜냐면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이전에 [[앙시앵 레짐]]에서 종교가 권력과 유착되어서 사회적 특혜를 누리고 민중과 사회적 약자를 탄압하는데 앞잡이가 되어 큰 폐단을 가져왔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 권력층의 유교 장려도 모두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유가의 탈을 쓴 [[법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공자의 '정명사상'만 봐도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는 생각이기에 권력층에서 좋아할 내용이 아니다. 게다가 [[맹자]]는 왕조 시대를 기준으로 할 때 상당히 급진적인 [[민본주의|민본사상]]을 주창하는 구절이 많았다. 그래서 철저한 황제 독재를 추진한 명나라의 주원장은 아예 맹자의 3할 가량을 덜어낸 맹자절문을 만들어 과거 교재로 쓰게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유교가 원래의 가르침이 적힌 원전교본을 두고 시대흐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면서 '변질된 모습도 유교의 한 부분으로 인정할 것이냐'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이 존재하는데, 이 차이는 조선말기 정치상황에 의한 왕권의 붕괴와 [[신분제]] 변동 등 사회급변에 따른 풍습의 변화에서 나타난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유교의 일부로 보느냐, 그렇게 보지 않느냐로 가름한다. 조선시대, 민간의 생활사와 풍속에 관련된 것들이 20~21세기에 들어 잘못 전해져서 오해하게 된 부분들은 [[조선/오해]] 문서를 유교에 대한 여러 비판과 반론들은 [[유교/비판과 반론]]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